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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창 교수의 슈마허 톺아보기 <5>슈마허의 삶과 시대(前)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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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창 교수의 슈마허 톺아보기 <5>슈마허의 삶과 시대(前)

창아 2017.11.29 23:32

김해창 교수의 슈마허 톺아보기 <5>슈마허의 삶과 시대(前)

 

슈마허 전기 ‘E. F. 슈마허, 그의 삶과 사상’ 표지(오른쪽)과 저자이자 장녀인 바버라 우드. 출처: ‘E. F. 슈마허, 그의 삶과 사상’.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는 1911년 8월 16일 독일 본에서 헤르만 슈마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헤르만 슈마허는 본대학 정치경제학 교수로 유태인계였다. 14세기 이래 슈마허 집안은 명문가로 대대로 브레멘 시장을 역임했으며, 조부는 콜롬비아 대사를 지냈다.

인물백과사전에 슈마허의 어린 시절에 대한 언급은 없다.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슈마허는 독일 영국 미국의 대학을 거치면서 경제학을 배운다. 19세인 1929년 본대학에 입학했다. 그해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으로 건너가 케인즈를 사사했고 1930년에는 옥스퍼드대학을 거쳐, 1932년에는 미국 콜롬비아대학으로 옮겨 베이커 윌리스 교수로부터 금융학을 배운다.

 

1934년에 독일에 일시 귀국했다가 다음해 안나 마리아 피터젠과 결혼한다. 유리버사, 배터리트랙션사에서 자문역을 하다 나치 치하에서 더는 견딜 수 없어 1937년 영국 이주를 실행한다. 그러나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슈마허는 영국 속의 독일인으로 ‘적국인’이 돼 한때 농장에 강제 수용되기도 한다.

 

 

첫 부인인 안나 마리아 피터젠과 결혼 후인 1930년대 어머니와 함께 알프스 여행 때 모습. 출처: ‘E. F. 슈마허, 그의 삶과 사상’.

 

슈마허의 가족을 보면 첫 부인인 안나 마리아 피터젠(1960년 암으로 사망) 슬하에 37년생인 장남 피터 크리스틴, 40년생인 차남 존, 46년생인 장녀 바라라 우드를 뒀다. 61년에 재혼한 둘째부인 베레니 로젠베르거 슬하에는 그해 차녀 버지니아, 67년생 3녀 카렌, 69년생 3남 뉴라, 74년생 4남 제임스가 있다.

 

슈마허의 여동생 엘리자베스는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세계적인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01-1976)와 결혼했다.

슈마허의 생애에 대해서는 장녀이자 자서전 작가인 바버라 우드 슈마허(Babara Wood Schmacher)가 쓴『E. F. Schumaher, his Life and Thought(슈마허의 생애와 사상)』(1984)이 있다. 딸이 본 아버지 슈마허의 청년기는 어떠했을까? 슈마허는 차남으로 태어났지만 그 보다 한해 앞에 이란성 쌍둥이인 형과 누나가 있었다. 이들과 연년생이었기에 남들이 보기엔 세쌍둥이로 착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는 애칭으로 ‘프리츠(Fritz)’로 불렸다.

 

프리츠가 일곱 살이 되던 1917년 아버지 헤르만 슈마허는 베를린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옮기면서 새집을 구입해 베를린에 자리잡았다. 그런데 당시 독일의 경제사정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식량이 부족해지자 슈마허 가족들도 직접 가축을 기르고 채소를 가꿨는데 어린 시절 프리츠는 먹을 것이 부족해 배고팠던 기억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중등학교 시절 프리츠는 교과목보다 인문학에 더 관심이 많았으며 특히 수학시간에는 예습을 철저히 한 반면 정작 수업시간엔 다른 책을 읽는 등 딴전을 피워 선생님한테 책을 뺏기고 혼난 적도 많았다고 한다. 연극반 활동을 하면서 17살 때엔 희곡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슈마허는 뭐든지 몰두하는 성미여서 어머니가 제발 주말에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쉬라고 간청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서 잠시 슈마허의 인생 전반 시절의 시대적 상황을 한 번 살펴보자. 1910년대 초반의 세계 인구는 16억 명, 유럽 인구도 3억5000만 명으로 급속히 늘어났고, 영국 인구가 2000만 명, 미국 인구가 1억 명을 돌파한 시기이다.

그런 상황에서 1914년 6월 오스트리아 대공 부처가 속국 보스니아를 방문했다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해 1차 세계대전이 촉발됐다. 독일은 8월에 러시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고, 1917년 영국이 독일군에 대항해 해상봉쇄를 했고 미국도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1918년 11월 종전이 됐지만 약 2000만 명이 사망했다.

 

종전 후 연합국은 1919년 베르사유협약을 통해 독일과 동맹국의 영토상실 조항을 추가하고 알자스로렌지방의 프랑스 반환조치를 하고 독일에 엄청난 배상금을 물린다. 이로 인해 1921~23년 독일은 전대미문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게 된다. 1924년 소련에서는 레닌이 사망하고 스탈린이 집권하게 되고, 1930년에는 독일 나치당이 일어나고, 1932년에 히틀러가 총리에 임명되며, 1933년에는 전권을 장악해 총통에 취임하게 된다.

슈마허가 미국에서 공부할 시기(1932-33)인 1929~33년 미국의 주식시장에 대붕괴가 일어나면서 경제대공황이 발생한다. 1936년 히틀러가 유태인에 대해 공민권을 박탈하고, 1938년 오스트리아, 1939년엔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한 뒤 그해 9월 폴란드를 침공하고 영국,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61년에 결혼한 둘째 부인 베레니 로젠베르거와 슬하 자녀들. 출처: ‘E. F. 슈마허, 그의 삶과 사상’.

 

청년 슈마허는 19세인 1929년 본대학에 입학해 조지프 슘페터에게 사사를 했고, 경제학에 매력을 느꼈는데 슘페터가 강연투어를 오래 떠나는 바람에 계속 배우지는 못해 아쉬워했다. 당시 슈마허는 테니스를 하루에 2시간씩 매일 칠 정도로 즐겼고, 틈틈이 모터사이클을 타고 며칠간 여행을 다녀오곤 했다. 아버지 헤르만 슈마허가 “모터사이클은 피상적인 여행밖에 안 되니 걷기를 즐겨하며 길 주변의 사물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도록 노력하라”고 조언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슈마허는 아버지에게 “모터사이클은 수단으로만 잘 활용할 뿐이니 안심하십시오”라고 답신을 보냈다.

 

슈마허는 그해 11월에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으로 건너가는데 케인즈를 사사했다. 이 때 영어 공부에 몰두할 때라 편지도 거의 영어로 써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학비부담을 느끼던 터에 다행히 1930년에 독일정부로부터 로드장학금을 받아 옥스퍼드대학으로 옮겼다. 옥스퍼드에서 그는 학우들이 영양결핍이나 가난을 겪어보지 못한 친구들이란 걸 깨닫고 단순한 경제이론보다는 국제경제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특히 베르사유협약의 독일 배상금부담문제가 침체된 독일 경제를 위협하고 있고, 이러한 것이 극우 세력이 득세해 장기적으로 유럽평화를 위협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뒤 슈마허는 조국 독일은 사랑하지만 히틀러 나치에 대해선 반대 입장을 명확히 갖게 됐고, 애국심과 현실 순응을 중시하던 아버지 슈마허 교수와는 갈등을 빚게 된다.

또한 옥스퍼드에서 독일유학생회장을 맡기도 했으나 나치를 신봉하는 친구들이 학생회를 장악하게 되자 1932년에는 미국 콜롬비아대학으로 옮겨간다. 거기서 금융학 전공의 베이커 윌리스 교수를 만났고, 다음해엔 대학 강사로 경제학 강의도 맡게 된다. 당시 슈마허는 뉴욕증권시장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 미 의회 브리핑자료를 만들기도 하고, 실업문제에 관심을 갖고 기계보다 사람을 중시하고 정부가 최저임금을 보장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다 슈마허는 1934년에 독일 베를린으로 일시 귀국을 했는데 얼마 뒤 지인의 파티에 서 첫눈에 반한 안나 마리아 피터젠과 1936년 5월 결혼하게 된다. 피터젠은 매력적인 여성으로 슈마허를 애태운 적도 많았다고 한다. 결혼 뒤 독일에서 한 동안 회사 생활을 하던 슈마허는 1937년 영국 이주를 실행하게 된다. 양가에서 반대도 많았지만 슈마허와 부인은 이를 감수하고 나치 독일을 떠나게 됐는데 1939년 9월 2차 대전 발발로 영국과 독일은 모든 연락이 단절된다. 1941년 12월 슈마허는 동생 에른스트가 러시아전투에서 19살 생일을 앞두고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런 와중에 1940년 영국에 이주해 있던 29세 청년 슈마허는 어느새 ‘적국인’으로 취급돼 직장에서 쫓겨나 농장에 수용돼 3개월간 노동을 하다 풀려나게 된다. 슈마허는 수용 중에 쓴 ‘Multilateral Clearing(다방향결제)’라는 국제결제제도에 관한 논문을 비롯해 많은 자료를 케인스에게 보냈고, 이것이 ‘케인스이론’에도 많은 도움이 됐으나 슈마허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고 딸 바버라 우드는 쓰고 있다.

 

1942년 케인즈의 소개로 슈마허는 옥스퍼드대학 통계연구소에 연구원 자리를 얻었지만 안정되지는 못해 그 뒤 슈마허는『옵서버』지의 촉탁기자로 일하기도 했고 나중에『타임스』지와 『이코노미스트』지에 집필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1944년에는 영국 사회보장제도의 초석이 된 베버리지법안을 제안한 영국 왕립경제학회장 윌리엄 베버리지를 위해『자유사회에 있어서 완전고용』을 집필하기도 했다.

 

딸 바버라 우드는 아버지 슈마허가 친한 영국 친구에게 독일어로 ‘나는 조국이 없는 놈(Ich bin ein Vaterlandsloser Geselle)’이라고 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며 나치 독일을 떠나 방랑과 고뇌 속의 ‘디아스포라’의 삶을 산 아버지 슈마허의 젊은 시절을 안타깝게 조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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